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소 불가침조약 (문단 편집) == 리트비노프 구상 == || [[파일:Beck,_Litwinow_1934.jpg|width=100%]] || || 1934년 당시 폴란드 외무부 장관 유제프 베크(좌)와 대담하는 [[막심 리트비노프]](우) ||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소련군은 유사시 루마니아를 통과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 출동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서유럽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하고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자, 큰 위협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집권 당시부터 소련을 비난해왔고 소련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독일이 곧 소련과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위기감이 소련 지도부를 덮쳤고 영국, 프랑스, 소련이 구성한 집단 안보 체제는 크게 흔들렸다. 소련 외무부 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반독 - 친서방파로서 영국, 프랑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해 독일을 포위하는 구상을 했으나, 스페인 내전과 안슐루스 등의 사태에서 4국 집단 안보 체제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 뮌헨 협정은 그의 구상에 결정타를 가했다. 수년에 걸친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자, 스탈린은 격노하여 1939년 4월 17일에 리트비노프를 경질하고 대서방 강경파인 몰로토프를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집단 안보 체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몰로토프를 외무 장관으로 임명한 뒤에도 외교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리트비노프는 해임 당시에 [[라브렌티 베리야]]가 자택을 수색하는 등 거의 숙청될 뻔 했으나, 스탈린의 신임을 완전히 잃지는 않아서 미국 대사로 전보되었다. 리트비노프는 독소 전쟁 당시 미국에서 여러 활약을 하여 미국의 분위기를 소련에 우호적으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한다. 또한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레닌]]과 함께 혁명 운동을 한 고참 볼셰비키였고, 1920년대 소련이 서유럽 여러 국가들과 다시 외교 관계를 복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능력있는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스탈린도 함부로 이런 인재를 숙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의중과는 상관 없이 독일 측은 리트비노프 경질을 자국에 유리한 조치로 보았다. 왜냐하면 리트비노프는 반독일주의자였고, [[뮌헨 협정]] 당시부터 독일에 극단적으로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리트비노프는 나치가 혐오하는 [[유대인]]이었다. 이런 인사 경질에서 독소 협력의 가능성을 포착한 것이 바로 리벤트로프였으며, 아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히틀러에게 독소 회담을 제안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